말이 날 휘두르는 게 아니라,
말에 의미를 부여하는 내가 날 휘두르는 거라는 것.
"친구야, 세상은 소중한 공기로 가득 차 있잖아. 우리는 이것 없이 살 수 없기에 한없이 중요하고."
"음, 그렇지. 맞는 말이야."
"그런데 왜 누구도 공기를 가지려 하지 않고, 휘둘리지 않고, 그렇게 신경 쓰지 않는 걸까?"
"어차피 공기는 잡을 수도 없고 가질 수도 없잖아. 게다가 공기가 날 어떻게 휘둘러."
"그렇구나." "당연한 거지."
"그렇다면 말은? 우리가 입으로 전달하는 비난, 칭찬, 책망, 질시. 이런 말들에는 왜 다들 가만히 있지 못하는 걸까. 어떤 말은 얻기 위해 나 자신의 생각과 행동까지 인위적으로 바꾸고, 어떤 말로 인해 좌절하고 죽음까지 이르기도 하잖아. 말은 결국 진실도 아니고, 잡을 수도 없고, 날 휘두를 수도 없는데."
"......"
말이 날 휘두르는 게 아니라, 말에 의미를 부여하는 내가 날 휘두르는 거라는 것.
칭찬을 들었을 때 기분이 좋은 건 칭찬 그 자체가 아니라, "이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이다"라는 내 안의 믿음이 반응하는 거다. 사람들이 말에 흔들리는 이유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을 아직 스스로 확정 짓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기는 내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타인의 말은 그걸 규정하는 척 날아온다. 그래서 흔들리는 거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스스로 먼저 써둔 사람. 그런 사람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흔들리는 풀이 아니라 굳건한 나무처럼.
말하는 사람 대부분은 진실을 담아 얘기하지 않는다는 것. 그 말을 함으로써 본인의 무언가를 보완하거나, 높이거나, 포장하려는 거다.
비난하는 사람은 "내가 옳다"는 걸 확인하고 싶은 거다.
칭찬하는 사람은 "나는 좋은 사람"임을 느끼고 싶은 거다.
질시하는 사람은 "저 사람이 가진 게 원래 내 것"이라고 믿고 싶은 거다.
전부 자기 얘기다.
누군가의 말은 결국 그 사람의 내면 상태를 그대로 투영한 거울이다. 나를 향한 말이지만, 실제로는 나에 관한 정보가 아니라, 그 사람이 지금 어떤 존재적 결핍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다.
그래서 존재가 굳건한 사람은 그 말을 들어도 "아, 저 사람이 지금 저게 필요하구나" 하고 보인다.
하지만 존재가 희미한 사람은 그 말을 진실처럼 받아들여버린다.
결국 존재가 희미한 사람끼리 서로의 말에 흔들리며 존재를 확인하는 구조 속에서 살아간다.
슬프기도 하고, 웃기기도 한 일이다.
말은 공기와 같다.
잡을 수 없고, 가질 수 없고, 사실도 아니다.
다만 그 말에 얼마나 흔들리느냐는,
결국 내가 나를 얼마나 알고 있느냐의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