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도착하는 진실을
듣는 일에 대하여
어제 본 어떤 헤드라인을 떠올려본다. 한 줄로 단정하게 정리된 그 문장이 처음 눈에 닿았을 때, 나는 그 자리에서 거의 모든 것을 다 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누가 어떤 잘못을 했고, 그게 왜 그렇게 분명한지가 한 번에 도착했다.
판단도 한 호흡 만에 끝났다.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구나. 그 일은 그런 일이구나. 의심을 위한 자리는 거의 비워두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서야 다른 결의 이야기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그 헤드라인 옆에 있던 맥락, 빠져 있던 시간, 다른 입장에서 본 같은 장면. 그것들은 처음 그 한 줄만큼 빠르지 않았다. 띄엄띄엄 도착했고, 깊은 곳에서부터 천천히 올라왔다.
그제야 알게 됐다. 처음에 닿은 그 한 줄은 빨랐기 때문에 모든 자리를 차지했고, 나중에 도착한 진실은 느렸기 때문에 이미 닫힌 자리에 들어와야 했다.
이 글은 그 비대칭에 대한 이야기다. 거짓은 왜 이렇게 빠른지, 진실은 왜 이렇게 느린지,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나는 어떤 자리에 서 있고 싶은지에 대한.
거짓은 단순하다. 그래서 빠르다. 진실은 보통 여러 겹으로 되어 있다. 한쪽 입장과 다른 쪽 입장, 시간이 지나며 바뀐 사실, 작은 단서들의 누적,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인과. 이 모든 것이 한자리에 모여야 비로소 진실 비슷한 것이 만들어진다. 그러니 진실은 늦을 수밖에 없다.
반면 거짓은 그 모든 결을 잘라낸다. 한 줄이면 충분하다. 잘라낸 자리만큼 가벼워지고, 가벼우니 멀리 빠르게 간다. 우리가 그것을 거짓이라 인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한 줄이 너무 단정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 빠른 한 줄을 한 번 받아들이고 나면, 뒤따라 도착하는 다른 결을 잘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 책은 이를 더 정확한 표현으로 짚는다.
"트위터·페이스북의 추천 알고리즘이 사용자를 자신의 기존 신념과 취향만을 강화하는 '필터 버블' 내부로 갇히게 한다 — 우리는 왜 서로 다른 '사실' 속에서 살게 되는가."
김유향·김보라미, 『AI와 민주주의』
각자가 다른 '사실' 속에서 산다는 것은, 각자에게 도착한 첫 한 줄이 다르다는 뜻이다. 처음 들린 거짓은 그렇게 자기 정원이 된다. 그 정원 안으로는 다른 결이 잘 들어오지 못한다.
시간이 지나 진실의 모서리가 드디어 드러나기도 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 자리에서 사람이 늘 진실 쪽으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은폐된 사실이 폭로되었을 때 대중이 진실을 직시하기보다 또 다른 거짓을 선택하는 현상은 심리적 부조화 이론과 정보의 비대칭성에서 기인한다."
정태성, 『히든 사이드』
이미 한 번 거짓을 받아들인 자리에서 진실을 다시 받아들이려면, 자기가 틀렸다는 사실까지 함께 받아들여야 한다. 그건 정보의 문제가 아니라 자존의 문제가 된다. 그래서 사람은 종종, 새로 도착한 진실을 보지 않고 또 다른 거짓을 한 번 더 고른다. 이중의 시야 상실이다.
이 모든 비대칭을 알고 있는 자들이 있다. 거짓이 빠르고, 진실이 느리고, 한 번 받아들인 거짓은 잘 빠지지 않고, 폭로 앞에서도 사람은 자주 또 다른 거짓을 고른다는 것을. 이걸 아는 사람은 그 비대칭을 우연으로 두지 않는다. 도구로 쓴다.
뱀의 혀라는 말이 떠오르는 건 이 자리에서다. 단순히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실이 도착하기 전의 그 짧은 시간을 정확히 노리는 사람. 한 줄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알고 그 한 줄을 가장 잘 깎아내는 사람. 진실의 늦음을 자기 무기로 삼는 사람.
그들이 던진 한 줄이 빨라서 그것을 거짓이라 부르기조차 어렵다. 우리가 거짓이라 부를 자리에 도달했을 때, 그 한 줄은 이미 자기 일을 다 마친 뒤다.
그런데 이 비대칭을 가장 무겁게 보는 자리는 따로 있다. 뱀의 혀를 휘두르는 한 사람을 지목하는 일을 잠깐 멈추고, 그 혀가 자랄 수 있게 만든 토양 자체를 보는 자리다.
"언어와 이데올로기, 시장 경제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오히려 누군가의 삶이 파괴되게 만든다는 건, 폭력이 사건이 아니라 시스템 그 자체의 내부 구조에 뿌리 깊게 박혀 있다는 뜻이 아닐까?"
슬라보예 지젝, 『폭력』
속도의 비대칭도 그렇다. 한 사람이 악해서 거짓을 빠르게 퍼뜨리는 게 아니라, 빠른 것이 더 멀리 가도록 설계된 광장 위에서 모두가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그 광장에서는 신중함이 시간을 잃고, 정정이 늦어 잊히고, 거짓의 한 줄이 시야의 첫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니 뱀의 혀를 가진 자가 등장한 게 아니라, 그 혀가 가장 잘 자라는 토양이 먼저 만들어져 있었던 셈이다.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와중에 누군가의 시간이 무너진다. 폭력은 사건이 아니라 구조다.
이 자리에 닿으면 분노할 대상이 한 사람에서 한 시대 전체로 옮겨간다. 그건 분노를 누그러뜨리는 게 아니라, 분노를 다른 방향으로 깊게 만든다.
여기까지 적고 나면 어김없이 같은 자리에 다시 선다. 거대한 비대칭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묻는 자리. 광장의 속도를 내가 늦출 수는 없고, 토양을 내가 갈아엎을 수는 없다. 그러면 무엇이 남는가.
한 가지가 남는다. 그 빠른 광장 위에서 내가 어떤 속도로 살 것인지. 첫 한 줄이 도착했을 때 그 자리에서 곧장 판단을 끝낼 것인지, 아니면 한 박자 늦게 한 번 더 묻는 사람으로 남을 것인지. 그것 하나는 내 몫에 남는다.
그래서 정한다. 빠른 사람이 되기보다 느린 사람으로 남는다. 그 느림이 답답함이 아니라 결이 되도록.
느린 사람으로 남는다는 게 입을 닫는다는 뜻은 아니다. 헤드라인 한 줄에 곧장 분노로 응답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누가 누구라고 단정하기 전에 한 번 더 도착할 시간을 자기 안에 비워둔다는 것이다.
이 비워둠은 회피가 아니다. 어떤 일에는 분명히 빨리 화를 내야 하고, 어떤 일에는 분명히 빨리 편을 들어야 한다. 다만 그 빠른 응답조차도, 한 박자의 머무름을 거친 후의 응답이기를 바란다. 도착하지 않은 결이 아직 있을지 모른다는 자각을 거친 응답이기를.
거짓의 속도에 끌려가는 사람이 아니라, 진실의 속도를 기다릴 줄 아는 사람으로 남는다. 그것이 이 비대칭의 시대에서 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작고 가장 정확한 자리다.
느린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은 의외다. 같은 사건을 같은 시간에 처음 들은 두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한 사람은 빠르게 판단을 닫고 다음 화제로 넘어간다. 다른 한 사람은 자기 안의 한 칸을 비워둔 채 며칠을 천천히 산다. 시간이 지나면 두 사람이 가진 그 사건의 모양은 완전히 달라져 있다.
느린 사람은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어서가 아니라, 더 많은 것을 들을 자리를 비워두었기 때문에 더 정확한 모양에 가까워진다. 빠른 사람은 더 적게 알아서가 아니라, 더 들을 자리를 처음부터 닫아두었기 때문에 작은 모양 안에 갇힌다.
한 사람의 느림은 작아 보이지만, 그 한 사람이 자기 자리에서 비워둔 그 한 칸이 결국 자기 시야의 정직함이 된다. 그리고 그 정직함은 곁에 있는 사람에게 천천히 옮겨간다. 그게 광장의 속도를 늦추는 가장 작은 방식이고, 어쩌면 유일한 방식이다.
거짓은 빠르고 진실은 느리다. 빠른 거짓은 자리를 차지하고, 느린 진실은 닫힌 자리에 다시 두드리며 들어와야 한다. 그 사이를 가장 잘 아는 자들은 그 비대칭을 자기 무기로 쓴다. 그리고 그 무기가 자라는 토양은 한 사람의 악함이 아니라 시스템 그 자체에 박혀 있다.
그러니 작은 자리에서 할 일은 명확하다. 빠른 한 줄 앞에서 한 박자 머무는 것. 느리게 도착하는 결을 들을 한 칸을 자기 안에 비워두는 것. 그 한 칸이 거짓의 속도와 진실의 속도 사이에서 내가 가진 유일한 시간이다.
가장 빠르게 도착한 한 줄이 가장 정확한 한 줄은 아니다. 그 사이에 머무를 줄 아는 사람만이, 느리게 도착한 진실의 발걸음을 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