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나는 정말 어딘가
있긴 한 걸까
오후 두 시의 회의실에서 나는 단정하다. 차분한 어휘를 고르고, 의견에 토씨 하나 어긋나지 않게 다듬어 말한다. 누군가 무리한 요구를 해도 입꼬리는 적당한 각도를 유지한다. 그 사람은 분명 나다.
그런데 퇴근길 카톡방 안의 나는 다른 사람이다. 욕이 한 줄 섞이고, 말끝이 짧아지고, 회의실에선 절대 못 했을 농담이 거침없이 튀어나온다. 그것도 분명 나다. 같은 하루 안에 두 사람이 살고 있다.
처음에 이 분열을 마주했을 때 떠오른 처방은 흔한 쪽이었다. 둘 중 하나가 진짜이고, 나머지는 가면이라는 것. 그렇다면 가면을 벗기만 하면 된다. 어느 자리에서든 똑같은 나로 살면 된다.
그래서 회의실에서도 카톡방의 톤으로 말해본 적이 있다. 친구들 앞에서 회의실의 단정함을 유지해본 적도 있다. 결과는 둘 다 어색했다. 그리고 묘하게 더 외로워졌다.
가면을 벗어 하나로 통일한 자리에서 만난 건 진짜 나가 아니라, 어느 자리에도 잘 맞지 않는 어정쩡한 나였다.
한참을 헤매다가 의심이 들었다. 그중 어느 것이 진짜냐고 묻는 질문 자체가 무언가를 미리 가정하고 있는 게 아닐까. 어딘가에 진짜 본질이 단단히 놓여 있고, 나머지는 그 본질의 변형이거나 위장이라는 가정.
그 가정이 흔들리니 풍경이 달리 보였다. 진짜의 위치를 처음부터 잘못 잡고 있었던 건 아닐까. 본질이라는 알맹이를 어딘가에 박아두고 그걸 찾아내려는 발상 자체가 막혀 있는 길은 아니었을까. 질문을 바꾸지 않고 답만 뒤적이면 답은 끝까지 안 나온다.
진짜를 어디에 둘지부터 다시 묻기 시작했다.
생각을 뒤집어 봤다. 본질은 내 안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어디에 놓이느냐에 따라 그때그때 매번 다르게 짜이는 무언가가 아닐까. 회의실의 나도, 친구 앞의 나도, 가족 앞의 나도, 다 가짜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만 작동하는 부분적 진리다.
진짜 나라는 단단한 알맹이는 없다. 대신 관계의 자리마다 다른 결로 응답하는 내가 있을 뿐이다. 그게 결핍이 아니라 인간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이 발상이 처음에는 허전했고, 곧 가벼워졌다. 어느 자리에 있는 내가 진짜냐고 다그치는 일을 그만두니, 자리마다 어떻게 응답할지를 골라낼 여유가 생겼다.
그런데 살다 보면 안다. 모든 자리가 똑같이 흩어져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어떤 자리에선 말이 더 솔직해진다. 다음 단어를 고르는 데 걸리는 시간이 짧아지고, 거절도 평소보다 덜 어렵다. 그 자리에서 나는 분명 더 멀리 간다.
반대의 자리도 있다. 사람은 충분히 있는데, 단어 하나가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에 세 번씩 검열된다. 그 자리에선 한 시간을 같이 있어도 혼자 있는 것보다 더 텅 빈 채로 돌아온다. 같은 사람들과 같은 시간을 보내도, 자리마다 내가 깊어지기도 하고 얕아지기도 한다.
왜 어떤 자리에선 한 사람만 있어도 충만하고, 어떤 자리에선 수십 명이 있어도 외로울까. 한참 곱씹다가 깨달은 건 의외로 단순했다. 차이는 사람의 수에 있지 않았다. 차이는 그 자리가 가진 깊이에 있었다.
같은 가치를 공유하고, 서로의 말에 진짜로 응답하는 자리에서 사람은 평소보다 더 솔직해진다. 그런 자리는 안전하기 때문에 오히려 용기가 난다. 거기에서의 나는 더 크게 살아 있다.
그러니 외로움의 반대편에 두어야 할 건 더 많은 사람이 아니라 더 깊은 자리였다. 흩어진 자아 중 어떤 것이 진짜냐를 묻기 전에, 어떤 자리가 나를 더 나답게 만드는지를 먼저 봐야 했다.
그래서 두 답을 한 삶에서 같이 살기로 했다. 고정된 본질이라는 환상은 내려놓는다. 그러나 모든 자리를 똑같이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어떤 자리에선 나를 더 깊게 짜고, 어떤 자리에선 얕게 짠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중심은 단단한 알맹이가 아니다. 중심은 어떤 자리를 골라 머물고, 어떤 자리에선 짧게 응답하고 빠져나올지를 정하는 감각이다. 진짜 나라는 명사를 찾는 일에서 어떤 관계를 골라낼지에 대한 동사로 옮겨가는 것이다.
이렇게 보니 흩어진 여러 나는 분열이 아니었다. 자리마다 다르게 작동하는 같은 사람의 조율이었다.
나는 어딘가에 묻혀 있는 본질이 아니라, 매번 새로 짜이는 무엇이다. 자리에 따라 다른 결로 응답하고, 사람에 따라 다른 깊이로 머문다. 그건 흠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증거다.
어떤 짜임은 나를 더 크게 만들고, 어떤 짜임은 더 작게 만든다는 것만 잊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어느 자리에 더 머물고 어느 자리에서 빠져나올지가 보인다. 진짜 나를 찾아 헤매던 자리에 어떤 관계를 고를지에 대한 질문이 들어와 앉는다.
흩어지는 게 아니라, 그때마다 새로 짜인다. 그 짜임을 골라낼 자유는 내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