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에서 문명까지, 지능이 진화한 연쇄 반응
직립보행, 큰 뇌, 문명. 우리는 이 결과들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런데 왜 하필 호모 사피엔스만 이렇게 됐을까.
250만 년 전의 지구에는 여러 종류의 인류가 살았다. 네안데르탈인, 데니소바인, 호모 에렉투스, 호모 플로레시엔시스. 그중 오직 한 종, 사피엔스만이 남았다. "우리"가 당연한 결과처럼 느껴지는 건 살아남은 쪽의 시선일 뿐이다.
흔히들 "뇌가 커서"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건 결과를 원인처럼 말하는 것에 가깝다. 네안데르탈인의 뇌는 오히려 우리보다 컸다. 뇌가 저절로 커진 것도, 뇌의 크기가 문명을 만든 것도 아니다.
인간 지능은 한 가지 원인의 결과가 아니다. 수백만 년 동안 여러 압력이 서로를 강화하며 만들어낸 연쇄 반응이다.
약 600~700만 년 전, 아프리카의 기후가 빠르게 건조해졌다. 빽빽하던 숲은 듬성듬성한 사바나로 변해갔고, 나무 위에서 과일을 따 먹던 조상들은 더 이상 예전처럼 살 수 없게 됐다.
나무 사이 거리가 멀어지자, 먹이를 찾으려면 땅으로 내려와 오래 걸어야 했다. 초원은 탁 트여 있었고, 포식자에게 쉽게 노출됐다. 한낮의 태양은 잔인했다. 이 압박 속에서 우연히 두 발로 서던 개체가 조금씩 더 살아남았다.
불안정해 보이던 그 자세는 의외로 많은 이점을 한꺼번에 가져왔다. 에너지는 덜 들었고, 시야는 넓어졌고, 햇볕에 노출되는 몸 면적은 줄어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앞발 두 개가 이동에서 풀려났다.
환경의 변화는 선택을 강요한다. 두 발은 낭만이 아니라 사바나라는 조건이 강요한 타협이었다.
이족보행이 가져다준 이점은 하나가 아니었다. 네 축에서 동시에 유리해지는 드문 해법이었다.
이 중에서도 가장 큰 파급은 손이었다. 도구를 쥐고 다닐 수 있었고, 먼 곳에서 먹이를 운반하고, 새끼를 안고 걸을 수 있었다. 뒷일은 전부 그 손이 만들었다.
그런데 대가가 있었다. 직립보행을 버티려면 골반이 좁고 단단해져야 했다. 그래야 두 다리 사이로 체중이 무너지지 않는다.
하필 같은 시기에 뇌는 커지고 있었다. 좁은 산도와 커지는 머리. 이 둘이 정면으로 부딪히는 지점에서 진화는 한 가지 타협을 택한다. 태아가 다 자라기 전에 낳는 것. 미숙아 상태로 세상에 내보내는 것이다.
출산은 다른 어떤 동물보다 위험해졌고, 아기는 다른 어떤 동물보다 무력해졌다. 창세기에 쓰인 "해산의 고통"은 신의 저주가 아니라, 두 발로 선 대가였다.
말은 태어나자마자 달리지만, 인간 아기는 걷기까지 1년이 넘게 걸린다.
너무 일찍 태어난 아기는 혼자 살 수 없다. 오래 안아줘야 하고, 오래 먹여야 하고, 오래 가르쳐야 한다. 한 사람의 부모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모두가 필요했다. 할머니가 필요했고, 이웃이 필요했다. "아이 하나를 키우려면 마을 하나가 필요하다"는 말은 은유가 아니라 진화적 사실이다. 집단이 같이 키우지 않으면 다음 세대가 없었다.
그리고 그 긴 의존 기간은 뜻밖의 선물이 됐다. 침팬지 새끼가 몇 달 만에 독립할 때, 인간 아이는 십수 년을 어른 곁에서 보낸다. 그 시간이 말과 이야기, 지식과 기술이 세대를 건너가는 통로가 됐다. 인간은 DNA 바깥에 기억을 저장할 수 있는 첫 번째 동물이 됐다.
취약함이 사회를 강제했고, 사회가 뇌를 키웠다.
한 가지 압력만으로 뇌가 커진 건 아니다. 네 개의 힘이 맞물려 서로를 밀어올렸다.
뇌는 체중의 2~3%밖에 안 되지만, 휴식 상태 에너지의 약 25%를 쓴다. 이 네 압력이 동시에 작동하지 않았다면 감당할 수 없는 사치였다.
오해하기 쉬운 사실이 있다. 인간은 처음부터 먹이사슬의 최상위에 있지 않았다. 200만 년의 대부분을, 사피엔스의 조상은 어정쩡한 중간 자리에서 살았다.
사자가 사냥한 영양을 하이에나가 뜯고, 그 다음에야 인류가 다가가 골수를 발라먹을 수 있었다. 맹수를 피해 숨어 살던 청소동물. 몇십만 년 전까지도 인간은 그런 존재에 가까웠다.
그런데 불과 수만 년 사이에 인간은 최상위 포식자로 뛰어올랐다. 다른 동물들이 수백만 년에 걸쳐 올라간 자리를, 인간은 찰나에 올라간 것이다. 이 급상승이야말로 인간 역사의 뼈대다.
생태계는 이 벼락출세에 대비할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우리 안에도, 아직 사바나의 불안이 남아 있다.
그 도약의 방아쇠는 약 7만 년 전 어딘가에서 당겨졌다. 언어의 구조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유발 하라리는 이 사건을 인지혁명이라고 부른다.
이전의 언어는 주로 경고였다. "사자!" "뱀!" 그 다음 단계는 뒷담화였다. 누가 누구와 어울리는지, 누가 속이는지. 이 수다는 쓸모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더 큰 집단을 결속시키는 접착제였다.
그리고 결정적인 도약이 일어났다. 눈앞에 없는 것, 그리고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도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강의 정령, 부족의 수호신, 조상의 약속. 허구를 만들어내는 능력.
사자가 있다고 말하는 건 원숭이도 한다. 사자를 신이라고 말하는 건 사피엔스만 한다.
허구를 만드는 능력의 뿌리에는 더 근본적인 엔진이 있다. 인과추론 — 관찰된 것에서 원리를 꺼내고, 그 원리로 아직 보지 않은 것을 예측하는 능력이다.
동물도 패턴은 안다. 까마귀는 신호등 색을 읽고, 개는 주인의 가방을 보고 산책을 예상한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눈앞의 단서가 사라지면 추론도 사라진다.
인간은 다르다. "비가 오면 열매가 많다"에서 멈추지 않고, "그럼 저쪽 계곡에는 지금 물이 있겠다"로 건너뛴다. 관찰 → 원리 → 아직 보지 않은 현상에 대한 예측. 이 삼단 점프가 사피엔스의 밑천이다.
인과추론은 사냥에선 다음 먹이의 위치를, 집단 안에선 타인의 의도를, 그리고 머릿속에선 존재하지 않는 신의 모습을 그려낸다.
혼자 쓰던 인과추론이 여럿의 머리에서 동시에 돌아가기 시작하자, 진짜 폭발이 일어났다. 같은 허구를 믿는 수많은 사람이, 서로 모르는 채로도 협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신, 국가, 법, 돈, 회사. 이 다섯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만져지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모두가 그것이 있다고 믿는 순간, 진짜 힘이 된다. 하라리는 이것을 상상의 질서라고 불렀다.
침팬지 집단의 안정적 한계는 약 150마리(던바의 수). 사피엔스는 같은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만으로 수억 명이 협력한다.
생태계의 천장은 집단 크기였다. 허구는 그 천장을 뚫어버렸다. 문명은 그 구멍으로 흘러나왔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인간은 왜 다른 동물보다 지능이 높은가. 이제 한 줄로는 답할 수 없다는 걸 안다. 하나의 원인이 아니라, 서로를 밀어준 네 번의 도약이었다.
기후가 아프리카의 숲을 건조시킨 그 순간부터, 먼 훗날의 문명까지 — 중간에는 서로를 강화하는 작은 압력들이 있었다. 어느 하나만 빠졌어도 사피엔스는 여기 없었다.
그 긴 연쇄의 끝에 남은 것은 한 가지다. 관찰에서 원리를 꺼내고, 없는 것을 함께 믿을 수 있는 능력. 우리가 매일 쓰는 이 능력은, 수백만 년이 걸려 만들어진 도구다.
지금 당신이 당연하다고 믿는 질서 중에, 사실은 누군가 만들어낸 허구는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