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평생 못 한 말,
내가 처음으로 한 말
명절 아침이면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엄마, 잘 지내?" 수화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잠깐 늘어졌다 줄어든다. "응. 다 잘 있지." 그 다음에는 늘 비슷한 안부가 이어지고, 통화는 길지 않게 끝난다.
전화를 끊고 나면 가끔 아주 이상한 기분이 든다. 사십 년을 같이 살아왔는데, 방금 통화에서 내가 엄마에 대해 새로 알게 된 사실이 단 하나도 없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시간을 나는 거의 모르고 있다. 모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평소에는 잊고 산다.
엄마는 자기 이야기를 잘 안 한다. 힘들었다고 말하지 않고, 서운했다고 말하지 않고, 외롭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으면 늘 한결같다. "괜찮아." "다 그렇지." 침묵의 정공법이다.
오랫동안 나는 그게 위세대의 사랑법이라고 믿었다. 자기 짐을 자식에게 옮기지 않으려는 의젓함이라고. 그래서 그 침묵을 존중하는 것이 내 몫이라 생각했다.
나중에 알았다. 그건 안 한 것이기도 했지만, 더 많이는 못 한 것이기도 했다. 위세대는 자기 이야기를 꺼낼 자리도, 그걸 들어줄 사람도, 그래도 된다는 허락도 받아본 적이 없는 시간을 살았다.
엄마라는 이름은 강하다. 너무 강해서, 그 이름 뒤에 살아 있던 한 여자의 시간이 거의 다 가려진다. 결혼 전, 출산 전, 누구의 어머니가 되기 전에도 엄마는 한 사람이었다. 가고 싶었던 곳이 있었고, 되고 싶었던 모습이 있었고, 견디기 어려웠던 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어떤 자식이든 그렇듯, 그 시간을 거의 모른 채로 자랐다. 내가 아는 엄마는 내가 태어난 뒤부터의 엄마였다. 그 이전의 그녀, 어머니라는 역할 안으로 들어오기 전의 한 여자는 줄곧 흐릿한 채 머물러 있었다.
누구의 어머니가 되기 전에 한 사람이 있었다.
언젠가부터 엄마에게 다른 식으로 묻기 시작했다. 안부를 묻는 대신, 옛날 이야기를 묻는다. 어렸을 적 어떤 동네에 살았는지, 그때 가장 좋아했던 게 뭐였는지, 결혼 전에는 어떤 일을 하고 싶어 했는지. 처음에는 "그건 왜 물어"라며 웃어넘기지만, 두세 번 같은 자리에 앉아 있으면 조금씩 흘러나온다.
그 자리에서 깨달은 게 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건 모르던 정보를 새로 알게 되는 일이 아니다. 그건 이미 거기에 있었지만 내가 외면해온 것을 마주하는 일이다.
엄마의 이야기는 내가 모르던 사실이라기보다, 내가 알아볼 마음이 없어서 비어 있던 자리에 가까웠다. 그 자리를 채우는 건 새로운 정보가 아니라 시선이었다.
그러다 시선을 내 쪽으로 돌려본다. 나와 내 또래는 엄마 세대와 분명히 다른 결을 가지고 산다. 우리는 흔들림을 입 밖에 꺼낸다. 무너졌다고 말하고, 무서웠다고 말하고, 잘 모르겠다고 말한다.
예전엔 그게 약점이라고 생각했다. 단단하지 못한 사람의 어쩔 수 없는 누설 같은 것. 견디게 한 건 속으로 다지는 다짐이라고 배웠으니까. 그런데 직접 살아보니 정반대였다. 흔들렸던 시간을 버티게 한 건 혼자 삼킨 결심이 아니라, 입 밖으로 꺼내 본 한 마디였다. 누군가에게 "사실 나 지금 잘 못 하고 있어"라고 말한 그 자리에서, 무너지지 않을 끈 하나가 새로 생겼다.
처음에는 두려웠다. 약한 부분을 보이면 사람이 멀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정반대로 움직였다. 내가 잘 안 풀리는 일을 솔직히 꺼내놓을수록, 듣는 사람은 가까워졌다.
완벽해 보이는 사람과는 사이에 거리가 생긴다. 그런데 약점을 인정한 사람 옆에 서면 사람들은 도리어 안도한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하는 안도다. 취약함을 드러내는 것은 거리감을 부수고 신뢰를 짓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약점인 줄 알았던 것이 신뢰의 자본이 된다. 숨길 때보다 드러낼 때 사람이 모이고, 다듬어 보일 때보다 있는 그대로 보일 때 관계가 깊어진다. 입을 닫는 게 미덕이 아니라, 입을 여는 용기가 자산이 되는 시대다.
그제야 두 시간이 한자리에 마주 선다. 한쪽에는 평생 자기 이야기를 입 밖에 못 낸 시간이 있다. 다른 한쪽에는 흔들리자마자 그것을 입 밖에 꺼내는 시간이 있다. 한 세대가 평생 못 한 말을 다른 세대는 첫마디로 꺼낸다.
두 시간 사이에 내가 서 있다. 엄마의 침묵을 위세대의 결로 그대로 두고 싶지도 않고, 내 세대의 고백을 당연하게만 여기고 싶지도 않다. 못 한 말이 결핍이 아닌 결인 것처럼, 처음 한 말도 흠이 아닌 결이다. 두 결 사이에서 내가 어디쯤 서 있는지가 새삼 또렷해진다.
그래서 두 가지를 정했다. 엄마를 들을 때는 거리를 두고 듣는다. 엄마의 선택이 내가 바라던 것과 달랐던 자리에서 품게 된 그늘진 기대는, 그 선택이 한 시대를 살아낸 한 사람의 생존 방식이었음을 인정하는 데서 풀린다.
그리고 내 흔들림은 숨기지 않고 꺼낸다. 약점이 아니라 신뢰의 신호로. 못 한 말의 무게를 알기에, 처음 한 말을 더 소중히 한다.
엄마의 시간에 대해서는 채우는 사람이 되고, 내 시간에 대해서는 꺼내는 사람이 된다. 듣는 결과 말하는 결을 같은 자리에서 다르게 짠다. 두 결을 다 살려두는 것이 두 세대 사이에 선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일이라 믿는다.
엄마와 사십 년을 살았는데, 그동안 한 번도 엄마를 안 적이 없다. 그건 내 무심함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엄마가 자기 이야기를 꺼낼 자리가 평생 거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못 한 말이 너무 많은 한 사람과, 처음 한 말이 너무 빠른 한 사람이 같은 핏줄로 이어져 있다.
이제는 안다. 엄마의 침묵 앞에서는 한 박자 천천히 묻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내 흔들림 앞에서는 한 박자 빠르게 꺼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 살아온 시간을 한 번에 메울 수는 없지만, 묻는 자리 하나는 만들 수 있다.
누군가는 내가 살지 못한 시간을 대신 살아주었고, 내가 살아낸 시간은 또 누군가의 첫마디가 된다. 그 사이에서 듣는 일과 말하는 일을 함께 하는 것, 그것이 내가 두 세대 사이에 서 있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