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 나라를 따라가본
신기한 출퇴근길
언젠가 알게 된 사실 하나가 머릿속에 한참 남았다. 파리 메트로에서 버스킹을 하려면 공식 오디션에 통과해야 한다는 것. 거리 음악이란 자유롭고 즉흥적인 일이라고만 여겨왔는데, 도시가 그 자리에 무대 자격을 정식으로 부여하고 있었다. 묘하게 신기한 풍경이었다.
한 번 호기심이 트이자 다른 나라들의 지하철 풍경도 궁금해졌다. 하루에 몇 번씩 오르내리는 그 좁은 칸이 나라마다 어떻게 다르게 굴러가는지. 찾아본 결과는 예상보다 더 멀리 있었다. 어떤 도시에는 사람을 칸 안으로 밀어넣는 직업이 있고, 어떤 도시에서는 가방을 공항처럼 엑스레이에 통과시키며, 어떤 도시에는 개찰구 자체가 없다. 같은 형식의 공간이 어쩌다 이렇게까지 다르게 짜여 있는 걸까. 6개국의 지하철 한 칸을 한 바퀴 돌아본다.
먼저 한국. 우리에겐 익숙해서 풍경에 가깝지만, 외국인의 시선으로 보면 임산부석의 핑크라이트가 도드라진다고 한다. 임산부 앱과 블루투스로 연동되어 임산부가 가까이 오면 자리에 분홍빛이 깜빡인다. 취지는 다정한데 현실은 조금 다르게 흐른다. 그 자리는 비어 있는 채로 한 정거장 한 정거장을 지난다. 어디서나 잡히는 와이파이가 묘하게 견고한 것도, 삶은 계란이 어쩐지 허용되는 분위기인 것도 우리만의 결이다.
일본은 또 결이 다르다. 푸셔맨이라는 직업이 실제로 존재한다. 출근 러시아워에 사람을 칸 안으로 밀어넣는 사람. 일부 역에는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지연증명서라는 것도 있다. 지하철이 늦어지면 역에서 발급해주고, 그것을 회사에 내면 지각으로 처리되지 않는다. 시간을 그토록 진지하게 지키는 사회라는 사실이 한 장면에 압축돼 있다. 약자우선석을 대하는 결도 한국과는 또 다르다.
중국은 스케일이 한 번 더 휘어진다. 지하철을 탈 때 가방을 공항처럼 엑스레이에 통과시킨다. QR코드 결제가 없으면 탈 수 없는 도시도 있어서, 외국인들이 첫 며칠을 헤맨다는 이야기가 흔하다. 칸 안에서 라면을 먹는 사람을 봤다는 후기도 더러 떠돈다.
다시 파리로 돌아온다. 처음의 그 오디션, 정식 명칭은 EMA(Espace Métro Accords)다. 이걸 통과해야 메트로 안에서 합법적으로 연주할 수 있고, 그래서 메트로에는 늘 라이브 음악이 흐른다. 구형 칸은 문을 손잡이 레버로 직접 돌려서 연다. 파업이 워낙 일상이라 그해의 파업 캘린더가 따로 돌 정도다. 칸 안은 수다로 가득 차 있다. 한국 지하철의 조용함과는 정반대 결이다.
뉴욕은 24시간 굴러간다. 막차 걱정이 없는 도시이지만, 그 빈자리에는 노숙자의 그림자가 함께 들어와 앉는다. 에어컨이 칸마다 복불복으로 작동해서 한여름엔 어떤 칸에 타느냐가 그날의 운이 된다. "It's Showtime!"을 외치며 봉을 잡고 공중제비를 도는 쇼타임 댄서들이 칸 사이를 옮겨다닌다. 100년 넘은 노선이라 시설 곳곳이 낡았는데, 그 낡음이 도시의 결을 만들어낸다.
독일은 또 다른 방향으로 휘어진다. 개찰구가 아예 없다. 시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보지 않는다는 철학이 공간 자체에 깔려 있어서, 표를 사는 일은 양심에 맡긴다. 대신 불시 검표에 걸리면 벌금이 꽤 무겁다. 자전거 전용칸이 있고, 강아지를 데리고 타는 사람이 흔하게 보인다.
여기까지 둘러보고 나면 자연스레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같은 좁은 칸인데 왜 이렇게 다 다른 걸까. 어떤 도시에서는 신뢰가 시스템이 되고, 어떤 도시에서는 사람을 칸 안으로 밀어넣는 일이 직업이 된다. 같은 공간 위에서 사회가 거의 정반대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어떤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었다. 사람들이 공간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그 사회의 비언어적인 언어라는 것. 거리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가 곧 그 문화의 정체성이 된다고 한다. 같은 1m라도 한국에서는 영역의 침범처럼 느껴지고, 미국에서는 편안한 거리처럼 받아들여진다.
거리 자체가 문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거리에 부여한 의미가 문화를 만든다.
지하철 한 칸은 그 의미가 가장 응축되는 공간이다. 좁은 자리에서 어떻게 함께 있느냐, 그 안에 그 나라가 공간을 다루는 방식이 거의 다 박혀 있다.
이 시선으로 한국의 임산부석을 다시 본다. 그 자리에는 '이건 임산부의 자리'라는 의미가 매우 강하게 박혀 있다. 의미의 무게가 너무 또렷해서, 임산부가 아닌 사람은 잠깐 앉는 일조차 머뭇거리게 된다. 그 자리가 비어 있는 까닭은 무관심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쪽에 있다. 의미가 너무 무거워서 비어 있다.
독일의 풍경은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들여다보면 같은 결이다. 개찰구 없는 공간에는 '시민의 자리'라는 의미가 박혀 있다. 누구도 서로를 의심하지 않는다는 약속이 그 공간의 정의가 된 셈이다. 그래서 개찰구 없이도 시스템은 의심 없이 굴러간다.
일본의 푸셔맨도 같은 자리에 놓인다. 그 공간에는 '정시 출근의 자리'라는 의미가 짙게 박혀 있다. 시간을 지키는 일이 곧 룰이다. 그러니 푸셔맨은 부끄러운 직업이 아니라, 그 룰이 지켜지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된다. 같은 행위가 다른 사회에서는 다른 자리에 놓인다.
파리는 또 다른 결로 휘어진다. 메트로라는 공간에는 '여기는 공연장이기도 하다'라는 의미가 한 겹 얹혀 있다. 그러니 오디션이 자연스럽다. 같은 한 칸이 한국에서는 비어 있는 분홍 자리가 되고, 파리에서는 무대가 된다. 공간의 모양은 같은데 그 위에 얹힌 의미가 풍경을 만든다.
그러나 또 한 가지가 보인다. 6개국이 그토록 다른데도 한 가지만은 어디서나 닮아 있다. 어디를 가도 사람들은 서로를 잘 보지 않는다. 다들 폰을 들여다보고, 옆에 누가 앉든 인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같은 칸에 100명이 있어도 100명이 모두 따로 떨어져 있다. 한국에서도, 파리에서도, 뉴욕에서도, 그 풍경만은 묘하게 같다.
다른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었다. 시선을 부딪치지 않고 동선만 겹치는 사이. 그것이 도시라는 형식의 본성이라고 한다.
우리는 서로를 인격이 있는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잠깐 스쳐가는 통행인으로 본다.
도시인은 그렇게 살아남는다. 매일 마주치는 수만 명을 모두 인격적으로 받아내면 살 수가 없다. 그러니 한국의 핑크라이트도, 독일의 신뢰 시스템도, 일본의 푸셔맨도 결국은 통행인 모드라는 공통 분모 위에 그 나라만의 의미를 한 겹 얹어 놓은 형태인 셈이다.
그래서 지하철 한 칸은 두 풍경을 동시에 보여주는 공간이 된다.
차이의 시선으로 보면, 그 나라가 공간에 부여한 의미가 저마다 달라서 같은 칸 안에서 행동이 정반대로 흐른다. 한쪽에서 비어 있는 자리가 다른 쪽에서는 무대가 되고, 한쪽의 신뢰가 다른 쪽에서는 시간이 된다. 닮음의 시선으로 보면, 어디서든 사람들은 통행인 모드로 서로를 흘려보낸다. 그 두 시선이 한 칸 안에 함께 들어 있다.
그래서 처음 타는 어떤 칸에서도 두 가지가 한 번에 읽힌다. 이 사회가 이 자리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는가, 그리고 그 위에서 도시인들은 또 어떻게 서로를 흘려보내는가. 한 풍경 안에 두 겹의 결이 나란히 놓여 있다.
그래서 다음에 어디 여행을 가게 되면, 가장 먼저 들어가봐야 할 곳이 정해진 셈이다. 지하철 한 칸 안에 그 나라가 공간을 다루는 방식이 들어 있고, 동시에 도시라는 공통 형식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함께 읽힌다. 한 칸짜리 풍경이 두 겹의 깊이를 동시에 보여준다. 좁은 자리 하나가 그렇게 한 사회를 통째로 펼쳐 보인다.
한 칸이 한 사회를 비추고, 도시 그 자체를 비춘다.